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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화 - 마탑과 이상한 수도 -
“마탑? 꽤 멀리 가야하지.”
카즈가 본이 차려놓은 아침식사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버섯볶음, 우엉조림, 치커리 샐러드, 온통 풀이었다. 그는 결국 자신의 몫으로 고기를 구워 식탁 위에 올렸다.
“수도 근처에... 흠, 마차 같은 걸타고 가는 걸 추천하지.”
카즈가 포크로 고기를 콕 찍어 우물대며 위치를 대충 설명하자 포크가 날아 들어와 카즈의 고기를 강탈해갔다. 발렌타인이 범인이었다. 본은 우아하게 캣닢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형제님께서도 같이 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길잡이가 필요한데...보수는 물론 드리는 걸로 하구요.”
카즈의 아침식사를 훔쳐간 자치고 참 뻔뻔한 부탁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반으로 줄어든 고기를 보고 슬픈 눈을 했다.
“나? 나는 생업이 있는데. 내 몸값은 비싸다고.”
그의 거절이 포크로 막아 더 이상 고기를 강탈하지 못하는 발렌타인만큼이나 모두 아쉬운 눈치였다. 본이 발렌타인에게 남은 치커리 샐러드를 앞으로 밀어주며 물었다.
“아니면 수도로 가는 용병단 같은 건 없는가?”
할 수 없이 고기를 포기하자 카즈는 즐거운 기색으로 여유롭게 고기를 뇸뇸 찍어먹었다.
“용병단 같은 눈에 띄는 걸 하다간 또 잡혀갈 걸.”
“아. 그건 곤란하겠군요. 역시 믿을 법한 분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발렌타인이 부러운 눈으로 카즈가 고기를 먹는 모습을 바라봤다.
“아, 맞아. 저도 귀를 가릴 무언가가 필요한데. 여러분, 남는 로브 없으신가요?”
사람 팔아먹고 사는 놈들은 떳떳한데 왜 내가 빌빌대야 하는지 모르겠네. 카나페가 치커리를 잔인하게 포크로 찢으며 중얼거렸다.
“두 명이나 로브를 쓰고 다니면 엄청 수상할걸.”
“윽.”
카나페가 찔린 소리를 내며 아침부터 얼굴에서 반짝반짝 빛을 발사하는 두 인물을 바라봤다. 남의 고기를 탐내는 표정과 찻잎 거름망을 들었다 놨다하는 얼굴이 이토록 잘생겨 보인다니. 확실히 그들의 외모는 눈에 띄긴 했다. 더군다나 귀를 가리기 위해서 본과 카나페가 로브를 쓴다고 해도 멀쩡한 인간 한명과 두 명의 로브 쓴 인물은 누가 생각해도 노예 혹은 수상한 자로 생각할게 뻔했다.
“터번으로 가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본의 말에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고기를 다 먹은 카즈가 방으로 들어가 붉은 천 같은 것을 손에 쥐고 왔다. 그는 그것을 카나페에게 줬는데, 터번이었다.
“어머, 그냥 주는 건가요? 고마워요. 잘 쓸게요.”
카나페는 이제 안심된다는 기쁜 표정으로 터번을 머리에 둘렀다. 하지만 그녀가 살던 곳에서는 터번의 쓸 일이 없었기에 상당히 어색한 모양새로 터번을 둘렀고, 그 모양이 거슬린 카즈는 터번을 감는 요령을 가르쳐주며 보기 좋게 다듬어 주었다.
“..정말 같이 가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발렌타인이 간절한 눈으로 카즈를 바라봤다. 정말 꼭 같이 가고 싶다는 눈빛이었다.
“모험은 한번 쯤 해볼 만 하다.”
본이 옆에서 곁들였지만 이것으로는 마음이 안 동하는 듯 했다. 이것보다는 더 확실한...더 구미가 당길 만한...예를 들면 금색으로 빛나고 동그란.... 발렌타인은 좋은 생각이 난 듯 얼른 품을 뒤졌다. 그리고는 카즈를 향해 내밀었는데, 카나페를 납치한 지하실에서 얻은 팔찌였다. 금색의 팔찌는 섬세한 문양이 각인되어 있었는데 꽤 값이 나가보였다.
“이 팔찌면, 아니 되겠습니까?”
“호. 꽤 값어치 나가 보이는걸. 길안내 정도로 그걸 정말 쓸 거요?”
카즈가 눈을 반짝였다.
“잠시라도 동료가 되어주신다면 우리는 감사할 뿐이니 말입니다. 도움 받은 것도 있으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저는 성기사. 신을 받드는 이인지라.”
“하지만 당신들을 따라가는 건 너무 고생길일 것 같은데.”
카즈가 몸을 쭉 펴 기대며 고개를 저었다.
“마탑에서 단서를 얻으면, 형제님께 다른 것들도 내어드릴 수 있습니다.”
“우린 운이 좋은 편이라서 괜찮다.”
“도움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계속 되는 설득에 카즈도 무척 고민이 되는 듯했다. 팔찌에 또 다른 보상. 이쯤 되니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다.
[매력 2d6+2 : 11]
“좋아. 그걸 주면 길 안내정도는 해주지.”
카즈의 대답에 일행의 얼굴이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가는데 5일은 걸리니까. 여러 가지 준비해 두는 게 좋아.”
본은 카즈에게 마차를 빌려야하는지 물었다.
“빌리면 편하지. 하지만 걸어가도 괜찮고. 5일은 걸어서 가는 기준이야. 마차를 타면 3일 정도.”
“빌리는데 돈 많이 드는 거 아닐까요?”
“1인당 10닢.”
“걸어가죠.”
“우린 넉넉한 형편이 아니니까 걷도록 해요.”
“엘프에겐 그 편이 더 편합니다.”
돈이 없이 슬픈 그들이었다. 시장에 들려 식량과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한 뒤 그들은 바로 수도로 떠났다.
[척후 2d6 : 9] [보급담당 2d6 : 7]
생각보다 그들은 빨리 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카즈의 안내와 카나페의 길잡이로 하루를 단축할 수 있었다.
수도 ‘자르카’ 는 아주 활기찬 모습이었다. 사막의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높이 쌓은 갈색의 암벽이 아주 웅장했다. 성문에서는 오고가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수레가득 물건을 실은 캐러밴과 낙타들이 개미떼처럼 움직였고 뾰족한 창을 든 경비병들이 수레를 들추며 물건을 확인하고 있었다. 사탕수수를 파는 소녀와 노점상들이 여행자를 상대로 물건을 판매하는 소리가 그득했다. 무엇보다 시선을 확 끄는 것은 제일 높이 우뚝 솟은 탑이었다. 홀로 어두운 색의 벽돌로 지어진 탑은 오래된 건물처럼 군데군데 금이 가있었지만 낡아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마탑의 꼭대기에서 파란 빛이 번쩍이다 사라졌다.
“저기가 마탑인가 봅니다!”
“방금 빛 같은게 번쩍거리지 않았어요?”
“과연 마탑같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카즈가 보여준 신분증으로 무사히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었다. 있는 신분증이라 봤자 발렌타인의 가문 소속 신분증 밖에 없어서 통과하지 못할까봐 마음을 졸였지만 카즈가 먼 곳에서 온 여행자들이며 도적을 만나 신분증을 잃어버렸다고 둘러대서 넘어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지역과 다르게 생긴 외형과 꼬질꼬질한 그들의 행색이 설득력 있었다.
안쪽에는 광장으로 이어지는 넓은 길에 많은 사람들이 다니고 있었다. 화려한 옷을 갖춘 사람부터 보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지저분한 옷차림의 노숙인까지. 빈부격차가 심해보였다. 그리고 가장 끔찍한 모습도 있었는데 치렁치렁한 장신구를 잔뜩 걸친 사람들이 옆에 목줄을 걸어 노예들을 끌고 다니고 있었던 것이었다. 노예 중에는 엘프도 꽤 많았다. 그들이 기함을 터트린 것은 당연했다.
“노예인가요?”
“이런...노예가 이렇게 많단 말입니까...? 이 도시는 도대체...!”
카즈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이 근방의 숲에 있던 엘프들은 이미 다 노예가 된지 오래야.”
본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자신의 고향인 하늘숲이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그곳에 있는 누이도. 비록 이곳이 어디인지, 왜 이곳에서 깨어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점은 이곳은 엘프를 노예로 부린다는 것이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하늘숲과 멀리 떨어진 곳 같다는 점이었다. 부디 무사하길. 걱정에 젖어든 본을 보고 카즈가 어깨를 토닥여줬다.
“..어떻게 사람에게 그런 일을...냥멘께서도 이런 것은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마탑은 이쪽이야.”
마탑으로 가는 내내 그들에게서 어두운 정적이 흘렀다. 저마다 생각하는 것이 있었다. 마탑의 입구에 도착하자 안경을 쓴 여인이 사무적인 어조로 그들을 맞이했다.
“무슨 용무신가요?”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다.”
“마법 물품을 잘 감정하는 마법사 형제님이 계십니까?”
“흠, 어떤 마법 물품인가요? 고대 유물? 아니면 마법이 부여된 물건?”
“고대 유물.....이 아닌, 몬스터에게서 나온 물건입니다. 그나저나, 아름다우십니다. 자매님. 샛별과도 같은 그대의 눈동자를 보며 저는 신의 은총을 느끼고야 말았습니다. 냥멘의 축복이 있기를.”
“그런 거라면...연금술 쪽이 더 가깝지 않으...어머나.”
발렌타인의 줄줄 쏟아지는 말에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미남의 칭찬에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카나페가 발렌타인을 째려봤다. 본은 익숙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발렌타인이 상큼하게 카나페를 향해 웃어보였다.
“물론, 가장 아름다우신 것은 당신이시지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카나페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맹렬하게 저었다.
휘이익.
카즈가 옆에서 휘파람을 불자 발렌타인이 그를 바라보고 슬쩍 윙크했다. 그 윙크에 카즈가 멈칫하며 얼굴을 찌그러트렸다. 흡사 주전자에서 기어 나온 바퀴벌레를 본 듯한 표정이었다.
“이쪽 방으로 가시면 됩니다.”
여인은 방의 호수를 알려주며 옆의 문을 열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자매님.”
그들은 문 안으로 들어갔다. 겉으로 보기엔 컴컴한 방같이 생겨 좁은지 넓은지 알 수 없었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환한 빛이 나며 그들을 감쌌다. 순간적으로 약간의 어지럼증이 그들을 덮쳤다. 출렁거리는 물 위의 나무 상자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 가실 때 쯤, 그들 앞에는 다른 방으로 향하는 새로운 문이 하나 있었다.
“방금 그건...”
“마법이었던 모양입니다.”
이상한 경험에 카나페가 인상을 찌푸렸다. 본은 방문에 노크를 세 번하고는 다짜고짜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이상한 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인사는 발렌타인이 대신했다.
“실례하겠습니다.”
방안은 이상한 물건들로 진열되어 있었다. 건들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수상한 도구들이 쌓여있었으며 그 중에서는 보라색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도 있었다. 읽을 수 없는 수식이 그림처럼 빼곡히 적힌 종이가 바닥에 굴러다녔다. 그들은 함정처럼 쌓인 책을 밟지 않게 조심하면서 높은 책장 뒤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쾌쾌한 옷더미가 장식처럼 걸쳐진 소파가 있었는데, 그 위에 누워있는 건지 앉아있는 건지 모를 요상한 자세로 책을 읽고 있는 마법사가 있었다. 미간을 잔뜩 세우고 책을 노려보고 있는 얼굴이 괴팍해보였다. 그는 책장을 넘기며 건성으로 그들을 향해 말을 걸었다.
“예- 무슨 일이세요-”
“실례합니다, 형제님. 도움을 구하고자 왔는지라,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구세기의 눈알이라고 알고 있나?”
본의 물음에 그가 눈썹을 찡긋거리며 안경을 밀어 올렸다.
“눈알이라니, 그건 처음 듣습니다만.”
그 말에 본은 카즈를 바라봤다. 모른다니 어떻게 된 것이냐는 뜻이었다. 카즈가 본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눈알이 아니고 보석.”
카나페가 카즈의 어깨를 위로하듯이 톡톡 치며 앞으로 나섰다.
“그럼 구세계의 보석은요.”
“오, 그게 더 발견되었나?”
이제야 마법사는 보던 책을 소리 나게 덮고는 몸을 세우며 그들을 바라봤다. 눈빛에 흥미가 가득했다.
“눈알이 여러 개 인가보군.”
“더? 여러 개 인가요?”
“여러 개지, 당연히 여러 개지. 그건 수액이 굳어 호박이 되듯이 세상에 남겨지는 흔적일세.”
“에엑. 뭐야 그럼. 이게 귀한 보물이 아니라는 건가요?”
“흔적입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아니. 매우 희귀하지. 과거의 흔적이라고나 할까, 대규모로 대지의 마력이 흐른 곳에서 생겨난다오. 그건 촉매야. 여러 가지 장난을 칠 수 있어. 마법사라면 그걸로 기적도 만들어 낼 수 있어. 그래서, 가지고 있는가?”
“아니.”
본이 단칼에 부정했다. 발렌타인이 형제님 하며 등을 콕콕 찔렀지만. 엘프를 노예로 납치하는 곳에서 인간을 믿을 수 없었다. 일단은 없는 척하는 게 나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촉매입니까....기적이라면 어떤? 설명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무한하지는 않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마력을 초월해서 사용할 수 있다네. 물론 쓰고 나면 사라지지만...세계의 마력이 굳은 흔적이라고나 할까.”
“마력의 흔적이군요...그렇다면 그게 어디에서 주로 발견된다 하는지도 아십니까?”
발렌타인과 마법사가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카나페가 슬쩍 본의 옆으로 와서 귓속말을 했다.
“본님, 뭐라도 알아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걸 저자가 탐내면 어쩌지요?”
“그럼 제 꺼 한 개만 보여주기로 할까요?”
“그럽시다.”
그들이 소곤소곤 회의를 하고 있거나 말거나 마법사는 계속해서 발렌타인의 질문에 대해 설명했다.
“흠, 보통 모험가가 찾아내지. 광산 같은 걸로 캐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과거의 마력 운동은 우리로써도 알 수 없고...그저 발견되는 것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네.”
“발견되는 것을 기다리는 거군요. 그렇다면...”
“이거 한 개만 발견했어요!”
카나페가 가방에서 구슬을 꺼내 얼른 끼어들었다. 카나페가 마법사에게 구슬을 보여주자 마법사는 놀랍다는 듯 그것을 받아들어 살펴봤다.
“오, 구세계의 보석! 유리 같은 것에 둘러 쌓여있지만 틀림없군. 엄지손톱 정도라면 좀 작지만. 팔러 온 건가?”
“일반 언데드가 이 물건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건가?”
“흠, 마력이라든가 신성력 같은 힘에 노출되었다면 얼마든지 가능하오. 그러니까, 그런 게 고인 물질이라고 해야 하나...그렇거든.”
“팔면, 값어치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정도면 200닢 쳐주겠네.”
200닢! 그들의 머리 위로 동시에 200닢이라는 돈 자루가 떨어지는 것 같은 충격적인 금액이었지만 그들은 애써 침착하며 티내지 않았다. 그 금액이 합당한 금액인지 아니면 거짓말로 싸게 말해 그들을 속이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본은 카즈에게 은근한 눈짓을 했다.
“그 정도면 싼 편 아닌가.”
카즈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장물밖에 몰라서.”
밑져야 본전으로 본은 일단 시도라도 해보기로 했다.
“죽을 고비를 넘겨 얻은 것 치고는 너무 형편없는 가격인 것 같다. 우린 이걸 다른 곳에서도 팔수 있을 것 같은데...”
“흠, 자네들의 고생은 내 알바가 아니나, 220닢. 이 정도면 꽤 후한 값이라네.”
220! 20닢이나 더 올려 그들은 쾌재를 부르고 싶었지만 속으로만 참았다. 본은 이 정도로만 받겠다는 거만한 태도로 응대했다.
“항상 그렇게들 말하지.”
“뭐, 못 믿겠다면 가 보시오. 다음에 올 때는 나도 평균적인 가격으로 살 테니까.”
“이걸 모아서 마법사들은 어디에 쓰죠?”
“병기로 쓰거나...새로운 세계를 탐구하거나. 사람마다 쓰는 곳은 다르오.”
본은 거래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카나페에게 물었다. 220닢은 아주 큰돈이었으며 수중에 돈이 없는 그들한테는 많은 도움이 될 터였다. 카나페는 망설였다. 이것을 얻은 경로도 그렇지만 마법사의 설명을 들으니 더욱 중요한 물건 같아 팔기가 찝찝해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이곳으로 오게 된 단서가 될지도 몰랐으며... 눈을 감고 결심을 한 카나페는 보석을 팔기로 결정했다.
“후회하지 않을 거래 일걸세.”
마법사가 돈자루를 카나페에게 넘겼다. 구슬 넘기는 카나페의 손이 몇 번이나 멈칫거렸다.
“아참, 혹시 에테르가 뭔지 아나?”
“마력을 그렇게 부르던 때가 있었지. 한 4세계 때였나....꽤 고어군.”
그들은 마법사의 탑을 나왔다. 뒤에서 좀 전의 안경을 쓴 여인이 사무적인 인사를 했다. 그에 발렌타인이 열렬한 사랑고백인지 인사인지 모를 말로 답해주었다. 카즈는 따로 볼 일이 있다며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는 발렌타인에게 받은 금색 팔찌를 들고 총총 거리며 거리로 사라졌는데 아마도 팔찌를 처분하러 간 것 같았다. 남겨진 일행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왜 이곳에 떨어졌는지, 다시 어떻게 돌아갈 수 있는지 알고 싶었지만 막상 그 이유를 찾으려니 무엇을 해야 좋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의논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저희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아마 이곳에서도 이상한 일 같은 게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그런 것을 되짚어 나가면 어떨까요?”
“소문을 수집하는 거라면 같이 행동하는 것보다는 따로 행동하는 게 더 효율적일 것 같아요.”
“물어보니 이곳에 냥멘의 신전도 있었습니다. 저는 냥멘의 신전으로 가서 알아보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각자 소문을 조사해 오는 것으로 합시다. 다시 모이는 곳은...카즈가 알려준 저기 앞의 여관이 좋겠습니다.”
본은 건너편의 낡은 여관을 가리켰다. ‘가라앉는 모래바람’ 이라는 글씨가 촌스럽게 걸려있었다.
“좋아요. 시간은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모이기로 해요.”
“부디 무사히 만날 수 있기를 냥멘께 기도드리겠습니다, 형제님들.”
다음 날, 그들은 다시 같은 시간에 여관 안에 모였다. 본은 느긋하게 여관에서 주문한 리코타 치즈 샐러드를 먹고 있었는데 그러는 사이 카나페와 발렌타인이 차례차례 들어왔다. 카즈는 아직 이었다.
“수확이 있었습니까?”
본의 물음에 카나페가 고개를 절레 흔들며 암염을 내밀었다.
“이게 수확이에요.”
카나페는 마을에서 소문을 들으려다 편지배달 의뢰를 맡게 됐는데 옆옆 동네 빵집까지 배달하고 거기서 하루를 묵고 암염을 사온 것이 다였다. 가는 도중 강도와 마주치기는 했지만 별로 위협도 되지 않았다. 본은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며 카나페를 위로했다. 발렌타인은 그들 중 가장 많은 일을 겪었다. 그는 제일 먼저 냥멘의 신전으로 가서 기도를 올리고 근황을 물어봤는데 자르타에서 불법적이고 안 좋은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어서 걱정이지만 딱히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부정적인 소식만 들었다. 그리고 높은 가문의 사람을 만나려 커다란 저택을 찾아갔는데, 문을 열어 달라 행패를 부리다 문지기가 경비병을 부르는 바람에 구치소에서 취객과 하루를 보내야했다. 다행이 아침에 풀려날 수 있어서 나올 수 있었다. 그 다음에 그가 간곳은 공동묘지였다. 망자와의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싶어 최근에 사망한 시체를 찾았지만 묘지기가 쫒아내는 바람에 여관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저도 펍에 들려 소문을 들으려고 노력했지만 귀부인과 이불과 황태자. 이상한 이야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본도 고개를 가로젓자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전부 큰 소득이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신전에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요즘 아동실종사건이 많다고 합니다. 원래부터 실종사건이 있었긴 했지만 요즘은 특히나 심하다고 합니다. 실종되면 시체는 물론이고 아예 단서까지 사라져서 무서운 소문이 돌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테이블에 음식을 차려 주던 여관주인이 발렌타인의 말을 듣고 갑자기 박수를 치며 맞장구를 쳤다. 그들이 깜짝 놀라며 여관주인을 바라봤다.
“아이고! 맞아요! 요즘은 바깥에 애들을 못 보낸다니까요. 눈 깜빡할 새 사라지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가게 바로 옆집만 해도 오늘 아침 애가 안 들어 왔다고 어찌나 울고불고 난린지 저도 딸이 있어서 같이 가슴이 찢어지더라니까요. 아참, 내 정신 좀 봐. 너무 속상해서 그래요. 여행자 같은데 이상한 말을 해서 죄송해요.”
여관주인은 황급히 말을 흐리며 허둥지둥 사과했다.
“오늘 아침이면...언제 실종됐다는 말인가? 경비대는 뭘 하고?”
“어제 저녁에 친구들이랑 놀다 헤어졌는데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어요. 아이고, 실종아동이 한, 둘이여야죠. 경비대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대충 집에서 기다리라고만 했답니다.”
본의 얼굴에 슬며시 걱정이 피어올랐다. 자신의 바로 앞에서 납치되던 카나페가 생각났다. 그런 식으로 아이들도 납치해서 어딘가의 노예로 파는 걸까. 비단 본만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는지 카나페와 발렌타인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저번에 봤던 엘프들도 그렇고. 기분 나쁜 곳이네요.”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비슷한 놈들의 짓일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시체의 증언이라도 들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규모가 큰 납치를 하면 다들 눈치를 챌 텐데 범인을 모른다니, 이상합니다.”
“귀족들과 연결되어 있을 지도 모르지요.”
“확실히 타겟이 모두 빈곤층인 것 같네요.”
그들이 범인이 누굴까 추정하며 말을 주고받을 때, 그 사이를 가르고 누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는 이런 이야기를 할 거면 나는 이만 길잡이 일을 그만둬도 되겠지?”
여관 계단에서 내려온 카즈가 그들이 앉은 테이블에 합석했다.
“카즈!”
“형제님, 가실 겁니까...”
“당신은 들은 것이 없나요?”
카즈는 그들이 주문한 음식에서 고기만 골라 먹으며 태연히 대답했다.
“뭐, 이런 건 팔수록 위험하잖아. 나는 목숨이 소중하다고.”
“때론 목숨보다 중요한 것도 있다.”
본은 자신의 플룻을 바라봤다.
“냥멘의 가호가 함께할 겁니다. 형제님, 도와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번에 받은 팔찌, 꽤 값나가는 거 아닌가요? 조사정도는 서비스로 해주실 수 있지 않나-”
“나는 이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카나페가 납치되었던 일도 그렇고, 앞으로 납치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일을 좀 더 알고 싶다.”
카즈가 소리 나게 포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좋아, 찾아서 어떻게 할 건데? 일단 너희는 외부인이고, 여기서 너희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야. 죽어 나자빠져도 아무도 모른다 이거지.”
“할 수 있는 곳까진 해봐야지요. 불의를 참고 넘길 수 없습니다. 냥멘께서도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혼자 죽지는 않을 테니 괜찮아요.”
“외부인 이기 때문에 더 효율적일 수도 있다.”
카즈가 인상을 썼다.
“두 번째로, 너희는 여기 아무 관계가 없어. 도움을 못 받는다는 소리야. 부탁이랑은 별개야. 사건은 경비대가 해결한다고. 아니면 그 윗선이라던가. 근데 너네는 연줄도 없잖아.”
그는 쉬지 않고 이어 말했다.
“세 번째로, 어떻게 처리하던지 죽이면 쫒기는 쪽은 우리가 될 가능성이 더 높아. 근데 이게 잡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안 보이는데. 수지가 안 맞아 보인다고.”
자신은 손을 떼겠다는 냉정한 태도에 그들은 너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연줄? 당신은 있다는 소리로 들리네요.”
“도둑이 연줄 없으면 살기 힘들지. 걸리면 보통 이거니까.”
카즈가 손목을 댕겅 자르는 시늉을 했다.
“경비대는 지금 전혀 할 일을 하지 않고 있어. 아까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는가.”
“그러면 더 위험하지. 거길 파고들면 경비대가 우릴 노릴 거라는 소리니까.”
“...하지만 무고한 이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그냥 둘 순 없습니다.”
“그러니까 카즈,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거죠. 그 연줄의 도움 같이 받아봅시다.”
“이봐, 이거 건드리면 경비대가 쫒아올 거라니까? 뇌물 같은 걸로 퉁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우리는 지나가는 모험가라고 치자,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마을이 그 모양으로 돌아가는데도 좋은가? 앞으로 더 심해질지도 모르는데?”
“그건 내가 아닌 다른 영웅나리가 해결해 주겠지. 난 영웅이 아냐. 내 역량을 뛰어넘는 일에서는 손 떼겠어.”
“카즈! 영웅은 따로 영웅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영웅이 되자는 것도 아니지만 영웅만 기다리고 있다가는 곧 네가 후회할 차례도 올 거야.”
본의 눈앞에 스치듯 단편적인 기억이 지나갔다. 커다란 발톱에 마을이 찢어지던 날, 울부짖던 비명 소리들, 손을 놓친 할아버지 그리고 피에 물든 아버지. 그들에게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카나페가 슬그머니 노래를 부르듯 단어를 불렀다.
“보-물-”
“보-물-입니다.”
“보물에 목숨을 팔정도로 멍청하진 않거든.”
“누가 죽으래요? 안 죽으면 되지?”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응당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습니다. 힘 있는 자는 약한 이를 보호하고 도와야 하지요.”
“네네. 영웅 나리들. 나리들이나 열심히 하시고, 저는 보수만 챙겨주시면 됩니다. 떠나고 싶군요. 난 애초에 너희들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가는데. 여관 옆집의 아들을 찾아주는 게 목표 아니야? 그렇다면 차라리 여기저기를 뒤져보는 것이 옳은 선택지이지. 오소리 굴 쑤시듯이 도시를 죄다 들쑤시는 것보다 말이야.”
오. 카나페가 좋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인데..? 그럼 당신은 애 찾는 것 정도는 도와줄 수 있는 건가요?”
카즈가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터번 위를 긁었다. 이거 왠지 내발로 불로 뛰어 들어간 느낌인데.
“그 정도야,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니까...”
그들의 표정이 대번에 확 밝아졌다. 카나페가 카즈에게 짓궂게 생긋 웃어보였다.
“그럼 부탁해요.”
“감사합니다, 형제님!”
“감사하다!”
본이 아이에 대한 정보를 물으러 냉큼 여관 주인에게 달려갔다. 카나페의 웃음을 보며 카즈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발렌타인이 그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아, 이거.
“내가 말한 이야기인데 말려든 기분이군.”
카즈의 말은 정확했다.
제 5화 - 마탑과 이상한 수도 - (완)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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